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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奇)씨를 중흥하신 정무공(貞武公)의 산소가 있는
원당(元堂)의 도선산(都先山)은 명현의 산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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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여년간 수호하여
왔었고 그 후로 후손들도 번영하여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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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830년에
전래의 묘위토를 묘아래에 거주하는 불량자손이 팔아 없애어 향화가 어렵게 됨에 따라 장성(長城)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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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光州) 두 문중은 산직이 표씨(表氏)가 배추씨를 팔러 다닐 때에 격년윤번제로 집집마다 수렴하여 향화를 49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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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계속하여
오다가 1879년 기묘에 경수공(耕叟公) 기양연(奇亮衍)께서 7차나 전매되어 어느 세도 재상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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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것을 그러니까 지금의 묘위토 전부를 환매하여 제향을 받들게 했고 신도비를 세우고
분묘를 사초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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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의 선산 품위를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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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손들이 멀리 살므로 자기 사문선산(私門先山)에는
극진히 하되 도선산에는 무관심하여 봉분은 퇴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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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양내(禁養內), 임목(林木)은 누가 어쨋는지
없어져 버리고 묘막은 신도비 아래 겨우 기어들고 날 정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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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은 극히 소박하고 참석인원은 인근자손 10명
내외였고 성묘 오는 자손도 드물고 제향날자는 전래의 날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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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통고 없이 바꾸는 등 침체문란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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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 식민정책은 민족정기와
가족윤리를 말살시키려고 소위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상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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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를 잊게 하는 흉악무도한 정책이었다. 우리는 이대로 말살되고 말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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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중창립(大宗中創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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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1월 8 일 시제 때에 선세산소를 수호하고 제향을 받들고 일가간에 친목을 도모하여 민족주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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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려고
행주기씨대종중(幸州奇氏大宗中)을 창립하여 규약을 제정하고 선대산소에 고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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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문중에 통고하여 종중기강을
혁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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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향일자확정(祭享日字確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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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날을 매년 11월 10일(양력)로 확정하여 선세산소에 고유하고 각문중에 통고한 후 1943년 11월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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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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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위토인가(祭位土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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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동란에 소관관서의 토지대장과 묘막이 소실되는 참혹한 와중에 수복하여 1952년 3월에 묘위토 전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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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산 제위토로 소관
고양군수의 인가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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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파문중대표자회의(各派門中代表者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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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2월 1일 서울시 창신동에서 각파문중대표회의를 개최하고 5위분산(五位墳山)을 사초하고 제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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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하기로 의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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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위분산사초(五位墳山莎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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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18일-22일 정무공(貞武公), 장녕공(掌令公), 응교공(應敎公), 안동김씨(安東金氏),
복재공(服齋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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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분산의 주위 송링을 처내어 벌안을 확장하고 봉분에 보토를 하고 장군석
등을 바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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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양재건축(德陽齋建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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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4월~6월 덕양재 17평과 부속행랑 7평 모두 24평을 전국문중의 협조로 건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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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향절차혁신(祭享節次革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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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추수기에 묘위토를 새로 추감하여 수확고 60가마중 24가마를 금초 제수용으로 정하고 유기제기를 구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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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유건을
제작하고 흘기(笏記)를 창홀(唱笏)하여 서원대제와 같이 행사하기로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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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보발간의결(大同譜發刊議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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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1월 9일 덕양재에서 대종중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전국 각파문중대표 70여명이 회집한 중에서 대동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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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하되 대종중
통제하에 대동보편수회를 구성하여 회장에 기규재(奇奎齋), 기형도(奇衡度) 편수부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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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백(奇老柏) 외에 각 부서와 전국 각 문중 수단위원으로
150 여명을 정하고 수단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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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풍군산소사초(德豊君山所莎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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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가을에 기우협(奇宇夾), 기승도(奇升度) 두 종친이 덕풍군 분묘를 사초 하였는데 이 분묘는 소나무 밭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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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이 나고 묘비 장군석 등이 쓰러진 것을 전부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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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보발간완역(大同譜發刊完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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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방방곡곡에 산재한 일가들을 전부
연락 수습하여 전래의 독선주의를 수정하고 전래에 누락된 400여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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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 포섭하여 획기적인 대동보를 편수하였는데
족보가 11권 지장록이 3권 합이 14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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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위토야계공사제지(祭位土野溪工事制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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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5월 고양 사방관리소는 제각 앞 묘위토 가운데로 도랑을 내려고 인부 100여명을 동원하여 3 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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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하는 것을
경기도청 직원을 데리고 가서 작업하는 인부를 전부 몰아내고 고양사방사업소장 홍사정(洪思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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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원상복구의 각서를 받아 도랑을 밖으로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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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들이 우리 위토를 황무지라고 허위 작성한 견적서를 발견하여
추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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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기씨청년계창립(幸州奇氏靑年契創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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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2월 서울탑골승방에서 기씨(奇氏)청년계를
창립하였으나 일부 간부의 불근신으로 아무 사업도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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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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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재공묘비건립(服齋公墓碑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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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5월 복재공 묘비가 부러진 것을 새로 세우고 1624년 만전공(晩全公) 가화시(家禍時)에 누구의
작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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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공, 삼강공 산소의 묘비를 부수고 거대한 장군석을 쓰러뜨려 개천가에 누워있는 것을 전부 원상복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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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년간 비참한 원한을 설욕하고 안악공(安岳公)부자(父子)분 산소에 예전 장군석을 새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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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양재개와(德陽齋改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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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15일 덕양재에 조선기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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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세유감편찬(先世遺感編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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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선세유감 3백부를 편찬하여 반포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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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교공묘비상석건립(應敎公墓碑床石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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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응교공 안동김씨 산소의 묘비와 상석을 광주문중에서 새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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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도의사서훈루낙항의서송포(山度義士敍勳漏落沆議書頌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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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정부에서 1962년 3.1절에 독립유공자 표창시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오적주축(五賊誅戮)의 주인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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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도(奇山度)의사가
누락되고 라인영(羅寅永)이 주동으로 되어있기로 당시의 대한매일신보의 방증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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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문을 사회각계에 발표하였던바
1963년 3.1절에 기산도(奇山度)의사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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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敍勳)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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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유허수호운동(幸州遺墟守護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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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4월 18일에 행주유허 산33번지의 임대원서를 경기도 관재국 고양출장소에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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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관재국(仁川管財局)에
출두(出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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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범이 1962년 7월 21일 최고회의에 저의 취득권을 탈취하려 한다고 탄원서를 제출하여 인천관재국장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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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두 요주를 받고나서
강신경국장을 만나보고 우리의 연고권을 강조했고 그후 관재국의 화해주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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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를 면회할 때 심한 면박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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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에게
청원서제출(請願書提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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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9월 23일 서울시 창신동에서 재경종친회의를 개최하고 우리 유허 행주산성 산33번지는 사적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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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되어 있으므로 승산이
없는 경원(競願)을 중지하고 이를 국유화시키고 서(徐)의 가족묘 3기를 발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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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허비를 건립하기로 의결하여 문교부장관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뒤에도 문교부장관에게 4,5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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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이의 촉구청원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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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國會)에 청원서(請願書) 제출(提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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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유허의 국유화는 관계기관이
서(徐)를 비호키 위하여 의식적으로 방해하기로 1964년 4월 15일 국회에
|
청원서를 민관식 소개로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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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전주발거(案山電柱拔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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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에 권력층으로 구성된 한양 골프장에서 우리 소유 안산에 전주(電柱)를 강압으로
세웠기로 즉시 한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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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 항의하여 1965년 1월 엄동에 이를 철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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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전에 아는 이가 현금 2만원을
우리 종중에 보조할터이니 양해해 달라는 것을 단연 거절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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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래의 산지를 한치라도 잘아 먹는 것 같아 거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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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지측량(山地測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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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 13일 산지를 측량하여 동편으로 많은 땅을 찾고 경계선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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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統領에게 嘆願書 提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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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9월 18일에 조심스럽게 대통령 각하에게 우리 종중의 행주유허수호에 대하여 관계기관의 기강 시정의
|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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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프라식수(植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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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4월 6일 이태리포프라 500주를 산지 경계선과 도랑가에 식부하였는데 가뭄과 병충해로 많이 고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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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도
잣나무 2년생 묘목 7백주를 동덕대학장 조동식에게서 얻어 심었으나 관리소홀로 다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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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공위원회(文公委員會)
파란(波瀾) 유회(流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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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15일 국회문공위원회에서 우리 안건 심의 중 여야간에 격론 노호로 유회되고 그 후 6월 10일에
|
우리 청원대로
이유없이 가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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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장통고서(國會議長通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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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 5일 제55회 국회에서 우리 안건에 대하여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국회의장 이호상으로부터 우리 종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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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고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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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교부장관통고(文敎部長官通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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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 25일 우리 청원 안건에 대하여 국회에서 우리 청원대로 의결되고 서(徐)가의 가족묘 3기는 파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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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했다는 통보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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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허비공사시작(遺墟碑工事始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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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서대문 성명호(成明鎬)석공장에서 거대한 오석비(烏石碑) 장이 10척 광이 3척3촌 후가 2척2촌의 석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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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수하여 조각(彫刻)에 착수하고
용두공판(龍頭龜版)은 최순우(崔淳雨)박사의 지시로 시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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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허비건립허가통지(遺墟碑建立許可通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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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4월 12일 문교부 권오병장관으로부터 우리 유허비 건립허가에 대하여 통보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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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서(徐)가의 가족묘 발굴을
모피하려고 문교부장관으로부터 허가할 수 없다고 4번이나 통보하여 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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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안하고 새로 결정 통고한 것이다. 국회의 결의는 관계기관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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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허비건립준공식(遺墟碑建立竣工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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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5월 14일 우리 기성(奇姓)의 자랑인 유허기념비를 건립시에 전국자손 4백여명이 참가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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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우리 기성 득성이래의 큰
잔치였고 귀빈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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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촌에는 농악일조와 탁주 한섬과 돼지를 제공하였다. 봄비가 와서 곤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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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무공묘비상석건립(貞武公墓碑床石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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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5월 15일 정무공묘비는 기근섭(奇近燮)고문이 상석은 기우섭 (奇宇夾)이사가 건립하고 전국 문중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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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도총무이사의 공적에 대한 기념비를 건립하고 같이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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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유허비 제막식에 참석한 지방종친들은 덕양재(德陽齋)에서
숙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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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제의병대장기삼연기념비건립(省齊義兵大將奇參衍記念碑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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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9일에 중앙과 현지에서 발기하여 거족적으로 8척 기념비를 장성(長城)공원 앞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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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현지, 전직 국회의원일파가 노골적으로 반대하여 네번 교섭하여 무마 진행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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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만전공산지매수(安城晩全公山地買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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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전상공(晩全相公)은 선조
광해 양조의 영의정으로 원로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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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능양군과 서인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세우고
집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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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불평파 이괄의 반란으로 서인일파는 공주로 피난 가면서 반대파를 모조리 학살할 때에 공은 서소문 자저에서
|
공의
묘소는 안성군 대덕면 내리 왕상골 산47번지에 예장을 하였는데 서인이 300년간 집권한 탓인지 그 자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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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초야에 묻혀있었고 따라서
남이 모시지 못한 조상의 산소까지 방치하여 고총을 만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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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전상공은 우리기성을 빛낸 선세인데 분묘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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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에 기규재(奇圭齋), 기형도(奇衡度)께서 묘소를
찾은 후 술한잔씩을 올려오다가 1967년 7월 7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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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2670평을 매수하여 대종중명의로 이전 등기하고 여러
차례 미송을 식부했다. 제수비용은 원당 도선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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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 제각 터세 쌀 한 가마니씩을 받아서 매년 11월 12일에 시향을 받들게 하였다.
|
공의
묘비, 상주, 인관석 등은 하세후 60년 후에야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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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묘막으로 스레트 지붕 토막 4간과 제(祭)기 일시벌을
준비하였다. 개간지 약500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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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유허비방명녹비건립(幸州遺墟碑芳名錄碑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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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월에 행주유허비 건립에 협조하여 준 여러 종친의 방명록비를 정무공신도비 좌편에 기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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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에게
고발장(告發狀)을
제출(提出)
|
안성이가(安城李哥)가 우리
유허비 뜰 앞에 무명고총(無名古塚)을 수축하고 상석을 가설해서 1967년 11월 4일
|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에게 고발장(告發狀)을
제출하였다.
|
|
□ 안성이씨대표(安城李氏代表)에게 벌금형언도(罰金刑言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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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8월 29일 서울 형사법원에서 안성이씨(安城李氏)대표
이시모(李時謨)에게 벌금형 3천원을 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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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무공묘의석건립(貞武公墓儀石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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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에 정무공묘소에 장명등(長明燈) 한좌, 인관석(人官石) 한쌍, 양마석(羊馬石) 한쌍, 망주석(望柱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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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쌍을 남포 애석으로 세웠다. 그리고
장성(長城)
참판공산소(參判公山所)에도 묘비, 상석, 양마, 망주 등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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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훈고법원장환영회(世勳高法院長歡迎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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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훈(奇世勳)이사가
광주고등법원장에서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영전하였기로 덕양재에서 재경종친 150여명이
|
회집하여 성대한 환영회를 개최하고
행주유허를 순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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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직교체(山直交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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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1월 시제(時祭) 후(後)에 산직(山直) 표영택(表永澤)은 투송(倫機)을 하고 거행이 성실치 못하므로
|
보상금을 주어
해임하고 기세준(奇世俊)종친을 오년(五年)기한부로 수호를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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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무공신도비건립(貞武公神道碑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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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공의 위대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전신도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정무공묘정에 세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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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각수리(祭閣修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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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4월 사이에 제각을 수리하고 행랑에 개와(蓋瓦)를 잇고 새로
행랑 4칸을 짓고 축대를 시멘트로
|
보수하고 제각 앞 다리를 시멘트 철근으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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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무공산소룡미사태방지(貞武公山所龍尾沙汰防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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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공 산소의 용미는 사태로 많이
패어 장마에 위험하기로 사태방지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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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유허순례(幸州遺墟巡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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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15일 재경종친 150여명이 가족동반으로 원당 산소에 성묘하고 행주유허순례를 했다.
|
행주유허순례는 서(徐)가의
가족묘를 발굴하기 전부터 매년 순례하여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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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공부장관(文公部長官)에게
고발장(告發狀)을
제출(提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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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5일 행주산성관리소장 서모(徐某)가 이총(李塚)의 사초(莎草)를 협조하였기로 문공부장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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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장을 제출하였다. 관리소장 서모(徐某)는 즉시 직위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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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이총일차정리(安城李塚一次整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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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8일 고양군(高陽郡)에서 이총(李塚)의 철거를 행정대집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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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孝烈行 擧位表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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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14일 행주유허비(幸州遺墟碑)에서
기우진대부인(奇宇鎭大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 열행(列行)과
|
기우창(奇宇昌), 기우정(奇宇正)의 효행(孝行)과 기정일(奇正一), 기우항(奇宇恒)의 학위(學位)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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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하였다. 이날 170여명이 원당에 섬묘하고
행주유허를 순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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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孝烈) 등(等) 미행표창(美行表彰)은 과거
시제 때에 많이 거행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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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총완전정리(李塚完全整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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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에 충장사 관리소장이 이총(李塚)의 개사초(改莎草)를 하였기로 이를 엄중항의하고 원상 복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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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구하여 1972년 7월
20일 완전정리하고 상석은 도랑가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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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주순례(幸州巡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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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14일 버스 4대로 170여명이 원당 성묘하고 행주유허를 순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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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유허안내판건립(幸州遺墟案內板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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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 5일 행주유허 안내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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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절충장군산지(楊州折衝將軍山地)및 묘위토회수(墓位土回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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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에 기씨 산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1962년 4월에 기세충(奇世忠)종친이 조사하였던 바 양주군 광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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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도리(廣積面 德道里)에 절충장군
기시철(奇始喆), 통덕랑(通德郞) 기오진(奇五振), 그리고 묘비를 빼 없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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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한분산 모두 세분산이 있는데 애석하게 족보에 누락되어 누구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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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석물, 이끼 등으로 보아 300-400년 가량 되고 산지와
묘위토가 있었는데 자손의 내왕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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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 한자리 수만평은 남에게 빼앗기고 묘비 빼없앤 산소의 묘위토도 알지 못하고 다만 산지 한자리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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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두자리가 남아 있는데 모두 산직 명의로 등기되어 있기로 잘 수호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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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4월부터 여러 차례 현지를 답사하고
교섭하여 6월에 산111번지의 1290평과 밭 803, 808 두 필지 1221평을
|
모두 회수하여 대종중명의로 등기 이전하여 산소를 수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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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2자리 가운데 한자리는 산직이의 금초 보수로 주고 한자리는 벼 한가마씩을 받아 매년 원당 도선산 성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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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순례할 때에 원당 텃세
600근과 합해 버스 전세요금에 충당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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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힘이 미치면 이에 보용(補用)할 위토(位土) 몇 마지기를 더 사려고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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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기씨대관발간(幸州奇氏大觀發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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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에 적년의 노력으로 기(奇)씨의 전모를 알 수 있는 행주기씨대관(幸州奇氏大觀)을
발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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