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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세 및 현재 주요 인물 자료
 
작성일 : 13-05-21 11:33
[덕성군(進),15세]일비장 기씨부인-열녀 ?-?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7,421  

기씨부인(기대승딸).jpg

기씨부인(기대승딸)1.jpg
 
                          일비장(팔뚝 무덤)  기씨부인
 
위치 :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

기씨부인은 대학자 기대승(奇大升)의 딸로 당시 덕망으로 이름 높은 문장가이자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손부이다.
기씨부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5년 전 맥동마을 하서 김인후의 손자인 김남중에게 시집을 왔는데
학덕이 높은 친정의 교훈을 잘 받아 단정한 용모와 조용한 성품, 시부모 공경, 일가 친척 사이의 우애,
야무진 집안 일처리 등으로 마을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임진왜란의 피눈물이 미처 가시기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남중의 집안은 피난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남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피난을 떠나고 기씨 부인은 남아서 집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는데, 남편이 차마
기씨 부인을 두고 떠나지 못하자 부인은 “처는 없으면 다시 없을 수 있지만 부모는 한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서 길을 떠나십시오.”라며 남편을 독려하였다.

전쟁의 사태가 악화되자 기씨 부인도 친정인 임곡으로 잠시 피난을 떠났다가 왜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마을로 되돌아오던 중이었다. 동네어귀인 황룡강을 막 건넜을 때 갑자기 왜군들이 나타나서
기씨 부인 앞으로 달려들어 팔을 잡아 이끌었다. 부인은 깜짝 놀랐지만, 태연히 “썩 물러 섯거라!”라며 호통을 쳤다.
왜군이 팔을 놓아주지 않자 미리 간직했던 칼을 빼서 왜군들에게 붙잡힌 팔을 잘라버렸다.
부인의 팔이 땅에 떨어지고 선명한 피가 붉게 흘렀으나 부인은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지 눈살 하나 찌푸림이 없었다.

왜군들은 기씨 부인의 태도에 놀라서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들 모습이 사라지자 기씨 부인은 땅 위에
떨어진 팔뚝은 뒤로 한 채 강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었다.
바람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 위로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부인은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노비는 땅 위에 떨어진 팔을 비단에 싸서 소중히 간직했다.

이듬해에 강원도로 치난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 김남중은 비단에 싸인 팔 하나를 정성을 다해 지내게 되었는데
그후 사람들은 팔 하나만을 장사지냈다 하여 일비장(一臂葬) 이라고 말하게 되었고
이 사연을 들은 조정은 맥동마을에 정문을 세워 기씨 부인의 뜻을 기리고 훗날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일비장은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선생 묘아래에 있는데 기씨부인이 몸을 던졌던
냇은 메어져 지금은 논으로 되어 흔적을 찾을길 없다.
 
기씨부인이 데리고 갔던 어린 두 아들은 왜병에게 끌려가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뒤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다
300년이 지난 일제시대때 고봉선생이 돌아가신 장소인 전북 고부에  하서(河西)라는 성을 가진 일인 경찰서장이
부임해 왔는데 자기 조상이 조선사람이라고 했다. 아마도 끌려간 두 아이가 너무 어려 성도 이름도 몰랐으나
당시 유명했던 할아버지 호 하서를 기억하고 그것을 성으로 사용했는지 알수 없으나  일본 어느 고을엔
하서 라는 성을 가진 자가 많다고 한다.
 
족보에는 고봉선생의 자녀분이 네분이십니다. 아드님이 셋, 딸이 한분이십니다. 따님으로는 하서 김인후선생의
손자며느리로 김남중의 부인인 여기나오는 기씨와 아드님으로는 효증, 효민, 효맹 이렇게 세분입니다.
그중에서 효민공과 부인 양씨, 효맹공과 부인 정씨. 모든분들이 효증공과 부인 김씨만 빼고 모두 전란에 돌아가셨다고
나옵니다.아마도 기씨부인은 같이 있던 남자 형제들이 모두 왜병에 돌아가시자 기씨부인, 양씨, 정씨는 같이 물에
투신자살하신 듯 합니다. 여자분들 세분은 함께 강에 투신자결하시고 두분형제는 돌아가셨지만 효민공께서는
다행히 두분 아드님이 계시어 나정과 파주에서 후손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째 효맹공께서는 자식이 없으셔서 대가 끊기셨습니다.
시인 김양식의 <은장도여 은장도여>는정유재란때 목숨바쳐 절대를 지킨 고봉 기대승의 따님이신
기씨부인의 비통한 실화를 서사로 옮긴 것입니다.
기씨부인의 '팔뚝 하나의 슬픈 무덤'은 장엄하고 숭고한 조선여인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팔에 대한 시입니다.
민족혼은 영토와 혈통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 범인류적으로 구현되는 것이 더 의미있다고 보입니다.
 
□ 팔뚝하나의 슬픈 무덤 이야기
제 1장  검은 먹구름 세차게 흘러들어
제 2장  첫새벽 찬바람만 옷깃에 스며들고
제 3장  나라 위한 忠節 불꽃으로 散華하니
제 4장  맥동고을에도 불길은 타올라
제 5장  黃龍江 푸른 물에 몸을 날리니
제 6장  나는야 언제가리 어이 가리요
제 7장  <臂葬>높은 뜻은
<종 장> 四百年 긴 세월 이젠 빛이 되려나
서문 <序>
長城郡(장성군) 麥洞(맥동)을 가로질러
劫으로 흘로내리는 黃龍江(황룡강) 강둑 황토길 따라
여름내 무성턴 억새풀들은 가을 재촉하는 듯
어느새 갈바람에 뽀얀 꽃씨 꿈처럼 날리며
奇氏夫人 기리어 찾아든 나그네를 반기는구나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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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기씨 열녀문이 세워지게 된 이야기.
 
기씨부인은 대학자 기대승(奇大升)의 딸로 당시 덕망으로 이름 높은 문장가이자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손부이다. 기씨부인은 김인후의 손자인 남중에게 시집을 왔는데 단정한 용모와 조용한 성품, 시부모 공경, 일가 친척 사이의 우애, 야무진 집안 일처리 등으로 마을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남중의 집안은 피난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남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피난을 떠나고 기씨 부인은 남아서 집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는데, 남편이 차마 기씨 부인을 두고 떠나지 못하자 부인은 “처는 없으면 다시 없을 수 있지만 부모는 한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서 길을 떠나십시오.”라며 남편을 독려하였다.
 
전쟁의 사태가 악화되자 기씨 부인도 친정인 임곡으로 잠시 피난을 떠났다가 왜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마을로 되돌아오던 중이었다. 황룡강을 막 건넜을 때 갑자기 왜군들이 나타나서 기씨 부인 앞으로 달려들어 팔을 잡아 이끌었다. 부인은 깜짝 놀랐지만, 태연히 “썩 물러 섯거라!”라며 호통을 쳤다. 왜군이 팔을 놓아주지 않자 미리 간직했던 칼을 빼서 왜군들에게 붙잡힌 팔을 잘라버렸다. 부인의 팔이 땅에 떨어지고 선명한 피가 붉게 흘렀으나 부인은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지 눈살 하나 찌푸림이 없었다.
 
왜군들은 기씨 부인의 태도에 놀라서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들 모습이 사라지자 기씨 부인은 땅 위에 떨어진 팔뚝은 뒤로 한 채 강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었다. 바람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 위로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부인은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노비는 땅 위에 떨어진 팔을 거두어 소중히 간직했다.
 
노비는 이듬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 김남중에게 그 사연을 전했다. 김남중은 안타까운 마음에 크게 통곡하고 말았다.
 
이 사연을 들은 조정은 맥동마을에 정문을 세워 기씨 부인의 뜻을 기리고 훗날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스로 팔을 자른 기씨부인 [-奇氏夫人]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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