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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세 및 현재 주요 인물 자료
 
작성일 : 13-05-20 12:18
[참판공(遠),27세]기산도(奇山度)-독립운동가 1869~1928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6,565  
기산도(1869-1928).jpg대동보 享-167p
 
조선의 항일운동가.
전남 장성(長城)출신. 구한국 말에 박인호(朴寅浩)·이기(李綺)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 국권 회복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격되자 암살단(暗殺團)을 조직, 매국오대신(賣國五大臣)의 암살을 분담하고 전동(典洞)에서
군부 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했으나 실패, 현장에서 체포되어 고문으로 왼쪽 다리가 절단되었다.
출옥 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 등을 역임하면서 계속 항일운동에 힘쓰다가
고흥(高興)에서 병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고흥군<역사적인물>  의사(義士)
기산도(奇山度) 행주 자(字)는 자인(子仁)이다. 식재(植齋) 재(宰)의 아들로 오적(五賊) 가운데 하나인 이근택을
대궐에서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피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붇잡혀가면서도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실토하지 않았다. 고종(高宗)이 승하 하자 평양립(平壤笠)을 쓰고
생을 마쳤다. 거(居)도화
 
다른 이름은 경(慶)이며 을사거의(乙巳擧義) 때 매일신보(每日申報)에는 산도(山濤)라 하였다.
자(字)는 자인(子仁)이다. 삼연(參衍)이 작은 할아버지이고 문사(文士) 재(宰)의 큰아들이다.
천성(天性)이 강직(强直) 대담(大膽)하고 충분심(忠憤心)이 강하였다. 일찍이 기독교계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박인호(朴寅浩), 이기(李綺)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 국권회복에 힘썼다.
1905 을사년(乙巳年) 11월 17일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5적을 살해하려고 박종섭(朴宗燮),
박경하(朴敬夏), 안한주(安漢朱), 이종대(李鍾大) 등과 암살단을 조직하고 저격무기를 구입한 뒤, 손성원(孫聖元),
박용현(朴鎔鉉), 김필현(金弼鉉), 이태화(李太華) 등을 파견,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俊)의 부하가 결사대본부인 한성모(韓聖模)의 집을 습격하여 박종섭, 박경하,
안한주, 이종대와 함께 붙잡혀 미수(未遂)에 그치고 다음해인 1906 병오년(丙午年) 2월 17일에 동지(同志)
이범진(李範鎭) 등 12명과 함께 다시 모의하고 을사5적(乙巳五賊) 중 한 명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을
자택에서 난자(亂刺)하여 기지사경(幾至死境)하였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19 을미년(乙未年) 3.1운동 당시에는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집하여 납부하다가 또 옥고를 치르고 난 후 고문 끝에 절게된 다리를 이끌고
유랑생활을 하면서 유언에 유리면걸지사(流離 乞之士) 기산도지묘(奇山度之墓)로 하라고 남기고 장흥(長興)에서
 병사(病死)하였다.
1963년 3.1절에 건국공노훈장을 추증하였다.
전남(全南) 고흥군(高興郡) 당오리(堂烏里)에 의사기념비(義士紀念碑)가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이선근(李瑄根) 박사가
지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독립사(獨立史), 세보(世譜)]
기산도(1869-1928)-유리언걸지사.jpg
기산도(1869-1928)-추모비.jpg 기산도 추모비

 
기산도는 1878년 10월 16일 전남 장흥군 월룡면 하남리에서 태어나 다섯살때 부터 글을 깨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16세때 의병장인 고광순(高光洵)의 사위가 되었고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지냈다.
장성에 자강회(自彊會)를 조직하여 인재를 모아 양성하고 그들에게 무력 투쟁의 투지와 정신력을 길렀다.
1904년, 기기 박관호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장성 광주간 고개에서 일병과 싸워 일병 수명을 죽이고
우리 측도 세 명이나 잃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기산도는 상경하여 이범석 서상규 동지들과
 매국원흉 암살단을 조직하였으나 거사를 앞두고 일 헌병에게 발각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도 발설치 않아
 일 개월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1906년 2월 16일, 구완희, 이세진 동지와 함께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군부대신 이근택 집을 밤 12시 무렵 습격하였다.
이날 이근택은 오후 7시경에 퇴궐한 뒤 8시 무렵에 손님 6명의 방문을 받고 이들과 대화를 나눈 뒤 11시 무렵에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첩은 옆에서 국문 잡기(國文雜記)를 읽고 있었다. 이때 기산도 일행 셋이 들어와 한 명은 이근택의 팔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명이 칼로 찔렀다. 이근택이 이때 재빨리 방안의 촛불을 끄자 일행은 칼로
이근택의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등 10여 곳을 마구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였다.
 
이근택과 첩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하인이 달려오자 일행은 역시 칼로 하인의 배와 얼굴, 다리 등 4곳을 찔렀다.
 이어서 집안을 경비하던 병정 6명과 순검 4명이 달려왔다. 일본 헌병과 순사도 이근택의 집에 설치한 경종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러나 기산도 일행은 이미 남쪽 담에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탈출한 뒤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이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別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突入)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亂刺)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昏絶)한 바, 그의 집 청직(廳直)이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危險)이 팔구분(八九分)이라더라.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別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突入)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亂刺)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昏絶)한 바, 그의 집 청직(廳直)이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危險)이 팔구분(八九分)이라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18일, ‘이씨 봉자(李氏逢刺; 이씨 자객을 만나다)’
 
떠돌이 거지 지사 기산도
기산도 등은 계획된 일을 무사히 마친 뒤 인적이 끊어진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들이 사라진 뒤 곧 이근택의 집은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경호를 책임진 한국군경을 비롯한 일본 헌병대 및 순사들이 즉각 출동하였으나,
그들은 13곳을 난자당한 채 널브러져 있는 이근택과 실신한 첩만 보았을 뿐이다.
 
기산도를 비롯한 범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기산도가 떨어트린 가발이 단서가 되어 결국 체포되었다.
이근택은 한 달 이상 한성병원의 특실에서 치료를 받은 뒤 퇴원하여 기산도를 신문하였다.
 
이때 기산도는, “너희 오적(五賊)을 죽이려는 이가 어찌 나 한사람뿐이겠느냐. 단지 나는 너를 죽이려던 것이 서툴러
탄로 나게 된 것만이 한스럽다”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의지를 당당하게 펼쳤다고 한다.
 
기산도는 2년 반의 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재판장은 이완용의 이복형 이윤용이었다. 출옥한 뒤에 그는 의병 전선에
뛰어들었다. 유생에서 계몽운동으로, 의열투쟁에서 다시 의병 항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는 고향 전남 장성으로 돌아와 재종조부인 의병장 기삼연의 뒤를 이어 의병투쟁에 나섰다.
 
1916년에는 일본 헌병 감시자를 따돌리고,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친척 기하요(奇夏堯)씨를 찾아와 당오리를
은거지로 낮에는 머슴살이하고, 밤에는 사랑방에 서당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써며 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 뒤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제자 박길용, 기동환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다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상해에 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일본군 보조(밀정)가 당오리로 기습하여 기산도를 사장나무에
묶어놓고 매질로 실신시킨 뒤 날이 밝으면 경찰서로 압송키로 하였으나 이 마을에 사는 김봉순 할머니가 부엌칼을
 감추고 어둑새벽에 물 길어가는 척 하고 결박한 포승줄을 잘라 도피케 하였다.
 
1920년에는 제자 박길용의 누이 박순임과 재혼한 뒤, 숨어 지내다가 일본 헌병 야우다(矢羽田)에게 발각 체포되고
기산도의 옷에서 기밀문서(연판장)가 나와 고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일경이 기산도에게 고진 고문을 하며
이를 추궁해도 자백치 않자 광주형무소로 이감하여 다시 가혹한 고문을 하자 “개 같은 너희에게 어찌 자백하랴”하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잘랐다.
 
1925년, 5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감하여 고흥 당오리에서 장흥으로 피신한 처 박순임의 도움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을
 추스르며 떠돌이로 살다가 1928년 51세로 운명하면서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 비 하나만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67년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고광순 따님과 같이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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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가

 전남 장성(長成)사람이다.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장자이고 의병장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의병장 녹천(鹿泉)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다.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1905년 11월 18일 기필코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
이종대(李鍾大)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권총 세자루에 실탄을 장전하고 단도(短刀) 네자루를 헝겊으로 싸서
 준비를 완료한 후 동지 손성원(孫聖元)・박용현(朴鎔鉉)・김필현(金弼鉉)・이태화(李太華) 등으로 하여금
적신배(賊臣輩)의 동정을 염탐케 하였다.
그러나 이날 9시경 결사대 본부인 중서(中署) 니동(泥洞) 한성모(韓聖模) 집에서 경무고문(警務顧問)
환산중준(丸山重俊)의 부하에게 그를 비롯하여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
이종대(李鍾大)・손성원(孫聖元) 등과 결사대 동지가 전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6년 2월 16일 퇴궐한 적신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은 내방한 6인의 방문객들과 담화하다가 상오 1시경
후실과 취침하였다. 이때 의사 세사람이 뛰어들어 이근택을 붙잡고 마구 찔렀다. 당황한 이근택은 전신의 힘을
 다하여 촛불을 껐다. 방안이 캄캄해지자 의사들이 닥치는대로 칼을 내리쳐서 이근택은 10여군데에 중상을
입었다. 이때 이근택의 머슴이 이근택의 신음소리와 그의 후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뛰어들다가
자객의 칼을 맞아 얼굴・배・허벅지 등에 상처를 입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소란한 소리를 듣고 이근택의 집을 지키던 병사 6인과 경위원(警衛院) 순검(巡檢)
4인이 달려오고 이근택의 방안에 장치하여 둔 설렁줄 소리를 듣고 일제 헌병과 경찰이 뛰어왔다.
그러나 의사들은 담장에 줄사다리를 놓고 도망한 뒤였다. 이근택은 한성병원에 입원 가료한 결과
추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혈안이 되어 의사들을 검거하고자 날뛰었다.
 
이근택의 집 대청 위에 변장하였던 가발 하나가 단서가 되어 그와 이상철(李相哲)이 피체되어 악형을 받게
되었다. 그와 공모하였던 전 경무사(警務使) 구완희(具完喜), 전 경무관(警務官) 이세진(李世鎭)은 도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가 심문을 받을 때에 동지가 800여 명이 된다고 말하자 매국적신들은 일본헌병까지
끌어들여 집과 신변을 엄하게 경계하였으며 내방객에게 꼭 명함을 받고 몸을 수색한 후에야 들여보내곤
하였다 한다.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나온 그는 1920년 임정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광주(光州)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심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전남 장흥(長興)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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