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字)는 자순(子順)이고 호(號)는 물재(勿齋) 이시다.
• 1487 정미丁未년에 태어나시다生. 1522 임오壬午년에 진사進士가 되시고 1527 정해년丁亥에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除慶基殿參奉 취임하지 않았다不赴.
후後에 아들以子 대승大升의 광국훈光國勳으로 순충보조공신贈純忠補祚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덕성군德城君으로 추증되셨다.
• 1555년 을묘乙卯년 음력陰曆 1월正月 15일十五日 양력陽曆 2월 6일 수요일 69세로 돌아가시다卒.
• 묘墓는 광주光州 금정동金井洞 뒷산기슭后麓에 갑좌甲坐 (8시30분 방향)로 있고 비有碑와 상석床石
주석柱石 등等 석물石物이 있다.
• 아들子 대승大升이 지은撰 묘지墓誌가 있다.
공公은 어려서少부터 높은 뜻有高志을 가지고 동생 준과 함께與弟遵 성리의 학문을 연구하였으나
俱事性理之學及 동생이 기묘년에 화를 입자弟被己卯禍 세상일에 뜻을 끊고絶意世事遂屛 광주居光州
고룡리古龍里로 낙남하여 살면서 자손子孫이 이어져 살고 있다仍居焉. 용동사에서 제사지낸다
建祠龍洞. 公長於文辭甞遊邊山與弟遵相和次蘇來寺韻曰海山迢⺡接天根絶磴蒼苔手幾捫野客倦投寒
嶂寺白雲空鎖碧蘿門松邊冷影秋霄鶴月下淸音曉嶺猿一衲孤僧方丈住皺眉應厭俗人喧 次義相庵韻曰鶴去層岑
凈社空海天孤日遠無窮一聲畵角秋山晩吹起斜陽萬壑風
남기신 시와 문장所著詩章은 유실遺佚되어 전하지 않고不傳 오직獨 2편의 시가有此二詩 덕양집에
기록되어載於德陽集 전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여기에 기록하여 전한다故錄于此. 사시던 유허지所居遺墟址에 유허비竪遺墟碑를
후손后孫 기근섭近燮이 지은撰 글文로 건립하였다.
• 부인配은 정부인贈貞夫人으로 추증된 남양방씨南陽房氏 3월 4일 돌아사셨다 忌三月四日
• 묘墓는 청주淸州 수신리修身里에 있었으나 잊어버려서因於失傳 추모단設壇于을 남편 덕성군德城君
묘墓 왼쪽左側에 세우고 후손后孫 기근섭近燮이 글을 지어撰 기록記 했다. 자식은 없다無育.
• 두 번째后 부인配은 정부인贈貞夫人으로 추증된 진산강씨晉山姜氏. 사과司果 영수永壽의 딸女이고
사평司評 학손鶴孫의 손녀孫이고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량공文良公인
희맹希孟의 증손녀曾孫이며 전주사람全州 최정崔侹의 외손녀外孫이다. 1501 홍치弘治 신유辛酉년에
태어나셔서 1534 갑오년甲午 음력陰曆 7월七月 17일十七日 양력陽曆 9월 1일 수요일 34세로 돌아가시다卒.
묘墓는 쌍분雙墳으로 남편 오른쪽祔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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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고(顯考) 장사랑 경기참봉(將仕郞慶基參奉)
기부군(奇府君)에 대한 묘기(墓記)>>>아들 기대승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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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부군(先府君)의 휘는 진(進)이요, 자는 자순(子順)이며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의 휘는 건(虔)인데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로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이며, 증조비는 정경부인
홍씨(洪氏)이시다.
조고의 휘는 축(軸)인데 행풍저창부사(行豐儲倉副使)로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었으며, 조비는 영인(令人)
정씨(鄭氏)이시다.
선고의 휘는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이며, 선비는 숙인(淑人) 김씨이시다.
부군은 성화(成化) 정미년(성종 18, 1487) 12월 정해일에 출생하셨는데, 여섯 살 에 부친을 잃었다.
장성하자, 높은 뜻이 있어 아우 준(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하루에 수백 자를 외웠 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자에 힘을 써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옛날과 지금의 일을 꿰뚫었다.
공은 널리 배우고 예(禮)로 몸을 단속하고자 하였고, 오로지 과거급제하여 녹을 먹으려는 계책을 하지 않았다.
아우가 먼저 조정에 올라 이름을 드날렸는데 불행히도 견책을 받아 죽자, 부군은 이미 당세에 벼슬할 뜻이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숙인께서 당(堂)에 계셨으므로 남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원년인 임오년(중종 17, 152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후 5년에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다음해인 무자년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상을 마치자 벼슬을 구하지 않고 마침내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집은 광주의 서북쪽 40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니 지방 이름을 고룡(古龍)이라 하였고, 동네 이름을 금정(金井)
이라 하였다.
부군은 집에서 있을 때에 쓸쓸하여 일이 없는 듯하였다.
화목(花木)을 심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서사(書史)를 열람하여 득실을 상고할 뿐이었다.
말년에 흉년을 만나 아침, 저녁의 끼니가 걱정인데도 태연히 자처하였다.
부군은 천자(天資)가 정직 성실하고 소탈하여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까다롭지 않고,
검박하며 사치하지 않았다.
책을 볼 때에는 대의를 통달하기에 힘썼으며, 일찍이 장구(章句)를 표절이나 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은 시문이 수백 편이다.
전배(前配)는 남양 방씨(南陽房氏)인데 일찍 별세하였고, 후배(後配)는 유인(孺人) 강씨(姜氏)인데 관향이
진주(晉州)이다.
부친의 휘는 영수(永壽)로 충좌위 사과(忠佐衛司果)이며, 조고의 휘는 학손(鶴孫)으로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이며, 증조의 휘는 희맹(希孟)으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시다.
유인은 단정하고 공손하며 은혜로워 부군에 배필 할 만하였다.
5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대림(大臨)이요, 차남은 대승인데 생원이며, 막내는 대절(大節)이다.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부인은 부군보다 22년 전에 별세하였는바, 집 뒤 2리쯤 되는 갑좌 경향(甲坐庚向)의 산에 안장하였다.
부군이 별세하시자, 그 해 3월 경신일에 유인의 무덤 남쪽에 장례하니, 선산인 때문이었다.
선비께서 별세하실 때에 여러 아들들은 모두 열 살이 넘지 못하였다.
부군께서는 홀아비로 사시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자식들을 부지런히 어루만지고 가르쳐 장성함에
이르렀는데, 모두들 미련하고 어질지 못해서 가정의 교훈을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죄악이 쌓여 마침내 부군에게 화가 미쳐 별세하였으니, 슬피 울부짖음에 애통한 마음이 뼛속에
사무친다.
이에 감히 묘기를 이와 같이 짓는 것이다. 묘표에 글을 적는 일은 앞으로 기다려 할 것이다.
슬픈 마음 하늘처럼 다함이 없으니, 아, 애통하다.
-------선비(先妣) 유인(孺人) 강씨(姜氏)를 이장한 묘기 ---------
아, 슬프다. 우리 선비께서 동원(東原)에 안장한 지 22년 만에 선부군께서 우리들을 버리고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장차 그해 3월 경신일에 장례하여 쌍분을 만들려고 했었는데, 땅을 파자 물이 나와 마침내 유인의
묘 위 5~6보 되는 곳에 옮겨 묘터를 잡고 장례를 마쳤다.
아들들은 선비를 모신 곳이 좋은 땅을 얻지 못함을 서글퍼하여 애통함이 뼛속에 사무쳤으므로 즉시 옮겨
모시기로 상의하였으나, 빈궁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금년 3월 경신일에 부군의 묘 옆에 옮겨
모셨다.
성계(姓系)와 행실은 부군의 묘기에 대략 서술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선비는 홍치(弘治) 신유년(연산군 7, 1501)에 태어나서 향년 34세에 별세하였으며,
5남 1녀를 낳았는데, 생존한 자는 세 사람이다. 거듭 생각건대, 선비께서는 부도(婦道)를 닦아 부군에게
배필이 되었는데, 부군은 은둔하여 덕을 쌓고 드러내지 않았으며, 후손들에게 법을 남겼으나 여러 아들들은
어질지 못하여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니, 사무쳐 울부짖음에 하늘도 다함이 없다.
이에 저으기 그 일을 이와 같이 기록하는 것이다.
훌륭한 작자(作者)에게 묘문을 청하여 덕행의 대략을 자세히 드러내어 묘에 표하는 것으로 말하면 장차
기다림이 있을 것이요,
감히 뒤늦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 애통하다.
아들 대승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