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보 亨-176p
.1896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킴
.1907 호남창의회맹소를 설치, 의병장으로 활동
.1908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일제의 흉탄에 순국
우리들은 조상의 피를 받아 문명한 이 나라에 태어났으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왜놈의 작은 조정(朝廷)에서는 살지 못하겠고, 하늘처럼 섬기고 살기는 오직 태황제(광무황제)만 계신 줄 아나이다.
그러므로 의병을 이끌고 영웅을 불러 일으켜서 피를 뿌리며 단(檀)에 올라 천지에 고하여 맹서하고 울면서 대궐을 바라보니 기운은 바람과 구름처럼 설렙니다.
비록 무기가 정예하지 못하다 하나, 맹자의 말과 같이 덕이 있으면 몽둥이를 가지고도 진나라와 초나라의 갑옷 입은 군사를 매칠 수 있으니,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잃었다 하지 말라. 뭇 사람의 애국심이 성(城)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창의 격서문(檄書文) 중에서(1907. 9)
선생은 1851년 1월 18일 전남 장성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4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 당대의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종조(從祖)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기정진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함께 위정척사사상을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지키려는 데에서 출발하였지만, 거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이라는 당시의 민족적, 국가적 위기에 당면하여, 우리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데까지 발전한 양반유생 중심의 성리학적 민족주의요, 고전적 민족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병인양요 직후에 올린 노사의 상소는 이른바 위정척사운동의 기치를 처음으로 올린 기념비적인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침략의 허점을 노리는 외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논하였다. 첫째로 대외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국론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유사시에 대비하여 국내의 지세(地勢)를 상세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셋째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적(軍籍)의 효율적인 관리와 국방력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넷째로 현명한 정책을 개진하게 하여 건설적인 정책을 대폭 수용해야 하는데, 한글로 쓰여진 정책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민중들이 제시한 건설적인 대안의 수용을 의미한 것으로 주목된다. 끝으로 내정개혁을 착실히 수행하는 것만이 외세를 막는 지름길이라 주장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 민중들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사의 문하에서 수학한 선생이 어떠한 생각과 사상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다. 더욱이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일반 유생들과는 달리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성리학에만 얽매이지 않고 널리 학문을 섭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유교 경전 이외에도 도교, 불교의 경전과 패관, 야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특히 병서도 읽고 연구하는 한편, 실제 여러 가지 병법을 시험해 보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훗날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군사들을 조련할 때, 주위 사람들이 “글이나 읽던 선비가 어느 겨를에 군사의 일을 저렇게 익혔을까”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선생은 의병장으로서의 면목을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젊어서 부모형제의 권유로 과거에도 응시하였지만, 과장(科場)의 문란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895년 8월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같은 해 10월 단발령이 강제 시행되자 전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선생도 1896년 3월 삼종질(三從姪) 되는 기우만(奇宇萬), 고광순(高光洵) 등과 함께 광주에서 거의하여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다짐하여 갔다. 기우만이 광주향교에서 노사의 문도들을 중심으로 거의를 천명하자 선생은 장성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광주로 진군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기우만의 의병부대와 합세한 뒤 스스로 군무(軍務)를 자원하였다. 이즈음 각 고을에서도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동참함에 따라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의병부대를 격파한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가 그 여세를 몰아 진격해 오고, 또 학부대신을 역임한 신기선(申箕善)이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파견되어 의병부대의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에 기우만은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의병부대의 해산에 극력 반발하면서,
“선비와는 함께 일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敵)의 협박을 받은 것이요,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서야. 이 군사가 한번 파(罷)하면 우리 모두는 왜놈이 될 뿐이다.”
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은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던 중, 의병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김한정(金漢鼎)이 거느린 전주진위대의 군사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전주에서 서울의 평리원(平理院)으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약 보름 동안 감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평리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배려로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이후 조국의 운명은 더욱 기울어져 갔다. 특히 1904년 2월 8일 일제는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런 다음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2월 23일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였다. 이른바 한일 공수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한일의정서」로 한국에 대한 정, 군사적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일제는 곧 이어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할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 사이에 체결된 「외국인 용빙(傭聘)에 관한 협정」이었다. 흔히 「제1차 한일협약」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협정은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는 고문정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일제는 이같이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제하여 정치,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면서 한국의 재정, 외교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갔던 것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1905년 7월 미국과의 카스라, 태프트 밀약, 같은 해 8월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 그리고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 조약 등 일련의 국제적 거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 받았다.
그 뒤 일제는 곧 바로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케 함으로써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하였다. 즉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러일전쟁 중, 이른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라는 이름으로 불법 주둔시킨 2개 사단의 일본군을 기반으로 군사 계엄통치까지 자행하면서 한국을 준(準)식민지 상태로 만들어 갔다.
나아가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7월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던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한국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소위 ‘차관정치’를 감행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것도, 바로 이 조약과 부수각서에 따른 조치였다.
이 같은 정치, 군사적 침략과 더불어 일제는 일본인 관민들을 동원하여 경제 침탈에도 힘썼다. 특히 일본인 지주와 상인들은 일제의 정치, 군사적 후원 아래 토지를 점탈하고, 상권(商權)을 장악하면서 미곡을 비롯한 한국의 재화를 일본으로 반출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정치, 경제적 침탈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한국 민중의 항일의식을 고조시켜 자발적인 의병운동 참여를 가져 왔다. 더구나 1907년 8월 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됨에 따라 높은 전투역량을 지닌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운동은 전국적이며 전민족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하여 갔고, 의병부대의 전투력도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선생 또한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분연히 동지들과 손을 잡고 일어났다. 즉 1907년 음력 9월 영광 수록산(隨綠山)에서 의병봉기의 깃발을 들었던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들을 규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연합 의병 지휘부를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어 항전준비를 완료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선봉장 김준(金準 ; 金泰元),
중군장 이철형(李哲衡), 김봉규(金奉奎), 후군장 이남규(李南奎)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 서석구(徐錫球), 전해산(全海山), 이석용(李錫庸), 김치곤(金致坤), 박영건(朴永健), 정원숙(鄭元淑), 성철수(成喆修), 박도경(朴道京)
참모 김엽중(金燁中), 김수봉(金樹鳳), 총독(摠督) 백효인(白孝仁), 감기(監器) 이영화(李永和)
좌익 김창복(金昌馥), 우익 허경화(許景和), 포대 김기순(金基淳)
이처럼 편제를 완료함과 동시에 선생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 항쟁을 촉구하면서 병사 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봉기 사실을 알리고, 대한매일신보사에도 글을 보내 의병항쟁을 후원하고 지지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갔다. 그 가운데 선생이 전국 각지에 발송한 「격서문(檄書文)을 보면,
“대저 왜노(倭奴)라는 것은 섬 가운데 조그만 오랑캐로 천지간에 사특한 기운을 타고난 것들이다. (중략) 이들은 30, 40년 동안에 독립국이니, 보호국이니 하여 아이들 장난처럼 수많은 비행을 자행해 왔고, 선전서(宣戰書)니 협약서(協約書)니 하는 것은 모두 우리를 우롱하는 것들이었다. 우리나라의 난신적자(亂臣賊子)와 결탁하여 기어이 우리의 종묘사직을 전복시키고, 우리의 산과 바다를 저들의 자원으로 만들고, 우리 백성들을 종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과 부일 매국노들을 맹렬하게 성토하였다. 그러면서 선생은 “조선에 살고 조선에 죽어 아버지와 스승의 교훈을 저버리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항일 구국 의병전쟁에 전 국민이 나설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그 말미에,
一. 군사나 백성이 왜적의 수급(首級) 1개를 베면 1백냥을 상으로 준다.
一.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왜적 수급 1개를 베면 면죄(免罪) 처분하고, 2개를 베면 1백냥을 상으로 준다.
라고 후기(後記)를 달아 부일 주구배들을 회유하는 한편, 일반 민중들의 항일 기운을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선생이 지휘하는 호남창의회맹소는 각 의병장 중심으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뒤, 각지로 분산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작전 목표가 정해지면 집결지와 집결일시를 각 부대에 통보하여 양민을 가장하거나 각개 행동으로 집결지에 모였다. 그런 다음 일시에 작전을 수행하고는 다시 각처로 분산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때문에 일본군은 좀처럼 의병부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거의 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장성 지역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북상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0월 29일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선봉장 김태원이 거느린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격파하고, 주민들로부터 군량 등 군수물자를 지원 받아 영광 법성포로 나아갔다. 그것은 법성포에는 조기어장과 세곡미의 운송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일본인들을 위한 경찰주재소와 우편취급소, 상점 등도 갖추어진 곳이었다. 따라서 선생의 호남창의회맹소는 이곳을 쳐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일제 침략 세력을 응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12월 7일 선생을 비롯하여 통령 김용구, 선봉장 김태원 등이 지휘하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부대는 영광 법성포를 공격하여 그곳을 탈환하였다. 그런 다음 순사주재소와 우편소는 물론 일본인 가옥 7채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창고에 쌓여 있는 세곡미를 비롯한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노획하였다. 그럼으로써 일제 침략세력에 대해 철퇴를 가한 것이다.
법성포 공격 직후 선생이 지휘하는 호남창의회맹소는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의병부대를 나누어 활동하게 되었다. 즉 선생이 영도하는 본대는 장성, 담양으로, 통령 김용구가 지휘하는 부대는 고창으로, 선봉장 김태원이 인솔하는 부대는 나주, 함평, 광주로 이동하여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이 영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가 장성, 고창, 영광 등지에서 기세를 떨치게 되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縱隊)로 이른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고 탄압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 토벌대는 1908년 1월 24일부터 광주, 나주, 장성, 함평, 순창 등지에서 의병부대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선생은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법성포에서 장성을 지나 1월 30일 담양의 금성(金城)에 도착하였다. 그것은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그 해 겨울을 이곳에서 보낼 생각으로 옮겨 온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가 금성에 도착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있던 중, 담양 주둔 일본군경이 습격해 왔다. 이에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3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당하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때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탈출할 가망조차 없었다. 때문에 선생은 의관을 정제하고 최후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깔려 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한다.
담양 금성에서 참패를 당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곧바로 순창의 복흥산(福興山)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그것은 그 동안의 전투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일 혹한이 계속되어 더 이상 항전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음력 설날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귀향하여 과세(過歲)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의병들에게 일시 해산을 선언하였다. 의병들을 각기 귀향시켜 설을 지내게 한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도록 한 것이다.
의병부대를 해산한 뒤 선생은 그 부근에 살던 재종제(再從弟)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다가 일본군에게 은신처가 탄로나 설날 아침 피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선생의 피체 소식을 접한 선봉장 김태원은 장병 30여 명을 인솔하고 급히 출동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을 구하기 위해 광주로 가는 길목인 경양역(景陽驛)에 이르렀으나, 이미 일행이 지나가고 난 뒤였으므로 달리 방도가 없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일본군에 피체되어 담양을 거쳐 곧 바로 광주로 호송된 선생은 다음날인 1908년 음력 1월 2일(양력 2월 3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피살되어 5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는 선생을 추종하는 의병부대의 구출 작전을 두려워한 일제가 재판도 없이 서둘러 학살한 때문이었다.
일찍이 선생은 거의를 앞두고 어느 날 붉은 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선생은 이 꿈을 붉은 해로 상징되는 일제를 소탕할 소임을 스스로 맡은 것으로 해석하고 늘 이를 자신하였다. 하지만 끝내 그 꿈이 무산되고 말았으니, 선생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읊었다는 다음과 같은 싯구만이 그 날의 안타까움을 대변하고 있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出師未捷身先死)
해를 삼킨 전년의 꿈도 또한 허망하도다(呑日曾年夢亦虛).
그러나 선생의 순국은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의 순국이 자극제가 되어 호남의병은 더욱 왕성하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선생과 같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던 수하의 김준, 김용구, 전수용, 이석용, 심남일, 박도경 등은 물론, 안규홍, 강무경, 양진여 등 평민 의병장들이 나타나 이후 호남을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부상시켜 갔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