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력 :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조선 후기의 학자.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을 수립하고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진다.
□ 저 서 : 노사집, 답문유편, 납량사의, 정자설(定字說), 외필(猥筆) 등
□ 생애와 활동사항
5세부터 한문을 익히기 시작했으며 천연두를 앓아 한쪽 눈을 실명했으나 학문에 전진하여
어린 나이에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고 1842년 관직에 잠깐 나아갔으나 일주일만에
사직하고 동부승지, 호조참판 등 40여차례의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오로지
고학으로 학문에만 전념하셨다.
초야에 묻혀 강학과 저술에만 몰두했지만 임술의책(壬戌擬策), 병인소(丙寅疏) 상소를 통해
농민과 나라를 위한 직언을 하였다.
노사의 학문의 깊이를 알려주는 다음의 일화가 유명하다.
조선 순조 3년때 중국 청나라 사신이 조선 인물을 있나 시험하기 위해서 조선 조정에
시 한편을 보내 뜻을 물어왔다.
‘용단호장 오경루하 석양홍(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역하면,‘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오경루 아래 석양은 붉네.’가 되는데, 조선의 관리들은 그 뜻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난감할 때 전라도 신동인 노사에게 물으니 7살의 노사는
‘동해유어 무두무미무척(東海有魚無頭無尾無脊) 동해에 고기(魚)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등도 없다.
화원서방 구월산중춘초록(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각이 졌다(日). 구월 산중에 봄풀이 푸르다’로 대구(對句)하여 청나라 사신을 놀라게했다.
순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크게 감탄하여‘장안만목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
즉 '장안(서울)의 수많은 눈이 장성의 한 눈만 못하다.'라는 말로 노사 선생을 극찬을 했다.